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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가 있는 아침] 세상 사람들이 -인평대군(1622~1658)

세상 사람들이 입들만 성하여서   제 허물 전혀 잊고 남의 흉 보는구나   남의 흉 보거라 말고 제 허물을 고치고자   -청구영언 진본     삼가고 또 삼가야 한다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이 남긴 시조다. 삼전도의 굴욕으로 병자호란이 끝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청에 끌려갔다가 3년 뒤 인조의 문병차 귀국하게 되자 형들을 대신해 인질로 갔다. 청으로 끌려가며 어미가 굶어 죽어가면서도 자식에게 먹이를 양보하고, 매서운 추위에 겉에 걸친 찢어진 옷마저 아들에게 벗어주는 부모들, 눈 속에서 새 한 마리라도 움켜잡으면 세자와 대군이 잡수셔야 한다고 갖다 바친 백성들의 충성심에서 느낀 한없는 부끄러움과 자책감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는 시서화에 모두 능했다. 인간의 생활에서 삼가고 조심해야 할 것을 이처럼 시조로 읊었다. 삶에 소중한 교훈이다.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사란 어쩌면 그리도 흡사한가? 지금부터라도 삼가고 또 삼가야 할 일이다.   그는 두 형과 우애가 깊었다. 인평대군이 감기에 걸려 반년이 지나도록 낫지 않자 효종이 찾아와 아우의 초췌함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가 끝내 37세로 죽자 왕이 몸소 시신을 염습했다. 유자효 / 한국시인협회장시조가 있는 아침 부끄러움과 자책감

2024-02-11

[시조가 있는 아침] 길림추(吉林秋) -안확(1886~1946)

강파(江波)에 바람 치니, 밝은 달이 구으른다   단풍이 서두르니, 도처마다 낙엽이라   만 리에 객의 수심이, 새로 수선하고나   -자산시선(自山詩選)   시조로 편 독립운동   일제강점기에 『조선문명사』 『조선문학사』 『조선문법』 등을 저술한 독립운동가 자산 안확(安廓)의 시조다. 안확은 고종의 해외 망명 유치 계획에 관여하고, 3.1운동 당시 마산 지역의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1930년대 들어 일본의 식민지배가 무단통치로 바뀌어 학문적 탐구가 어렵게 되자 국내를 벗어나 만주와 중국, 노령의 연해주 지역과 하와이를 유랑하였다.   바람이 강의 수면을 치니 물결이 일고, 밝은 달이 굴러간다는 표현이 재미있다. 나무들은 서둘러 단풍을 떨어뜨리니 도처에 낙엽이다. 수난의 고국을 떠나 어언 만 리, 나그네의 수심이 새록새록 쌓인다.   안자산은 7년 동안의 유랑을 마치고 귀국해 어학과 고구려 문학, 시조.향가.미술사 등에 관한 글을 발표하였다. 일본어 쓰기를 강요하던 1940년 이후에는 아예 붓을 꺾었다. 그는 240수에 이르는 시조 작품과 이론을 발표했으니 거의 독립운동 수준이었다. 오늘의 우리는 이런 선열들의 피땀 위에 서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유자효 / 한국시인협회장시조가 있는 아침 길림 독립운동가 자산 시조 작품 연해주 지역

2023-11-10

[시조가 있는 아침] 짚방석 내지마라 - 한호(1543∼1605)

짚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솔 불 혀지 마라 어제 진 달 돋아온다   아이야 박주산채(薄酒山菜)일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병와가곡집   도덕성의 힘   짚으로 만든 방석을 내지 말아라. 낙엽에 앉으면 된다. 관솔불을 켜지 말아라. 어제 졌던 밝은 달이 또다시 뜬다. 가을밤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진수성찬이 무슨 소용이리. 얘야, 변변치 않은 술과 나물일지라도 좋으니 없다 말고 내려무나.   옛 선비들이 이상으로 생각했던 생활은 안빈낙도였다. 가난함을 편히 여기고, 도를 즐기는 생활이었다. 여기서 도(道)라함은 학문이나 수양의 세계다. 그들은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검소한 생활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이것이 지식인 사회의 도덕성을 지키는 힘이 되었다. 금전(金錢)이 부르는 유혹에 빠져 패가망신하는 고관대작들을 보며 전통사회의 청빈 사상을 생각한다. 고도 산업사회로 치달으며 사라져간 선인의 엄격했던 자기관리가 그립다.   한호(韓濩)는 조선 선조 때의 명필이다. 호는 석봉(石峯)으로 왕희지와 안진경의 필법을 익혀 행서와 초서 등 각 서체에 모두 뛰어났다. 추사 김정희와 함께 조선 서예의 쌍벽을 이룬다. 유자효 / 한국시인협회장시조가 있는 아침 짚방석 한호 고도 산업사회 조선 선조 조선 서예

2023-10-06

[시조가 있는 아침]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 이이 (1537-1584)

제2곡 화암(花巖)   이곡(貳曲)은 어디메오 화암에 춘만(春晩)커다   벽파(碧波)에 꽃을 띄워 야외로 보내노라   사람이 승지(勝地)를 모르니 알게한들 어떠리   - 율곡전서(栗谷全書)   천재도 극복하지 못한 난세(亂世)   이이(李珥)가 43세 때 해주 석담(石潭)에 은거하며 지은 10수의 연시조 가운데 세 번째 작품이다. 서시에 이어 관암(冠巖)의 아침을 즐기는 제1곡, 그리고 꽃바위의 늦봄 경치를 읊은 것이 제2곡이다.     푸른 물결에 꽃을 띄워 멀리 들판으로 보내 이 아름다운 곳을 모르는 사람들이 알게 하면 어떻겠는가고 노래하고 있다. 이 시조는 주희(朱熹)의 무이도가(武夷櫂歌)를 본떠서 지었다고 하나 율곡의 미의식은 주희와 달랐다. 율곡은 “시는 담백하고 꾸밈이 없어야 한다”는 시론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주희의 시가 수채화라면 율곡의 시는 묵화라고 하겠다.   이이는 13세에서 29세까지 생원시와 식년문과에 이르기까지 아홉 번 치른 과거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렸다. 다섯 살 때 어머니가 병석에 눕자 매일 외할아버지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홀로 들어가 기도했으며 열한 살 때 아버지가 와병하자 칼로 자신의 팔을 찔러 흐르는 피를 아버지의 입에 넣어드리며 울었다 한다.     통일 일본의 조선 침공 대비를 주장했으며 붕당을 초월해 인재를 등용할 것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과로로 병을 얻어 48세로 사망하였다. 유자효 / 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고산구곡가 제2곡 화암 연시조 가운데 조선 침공

2023-10-05

[시조가 있는 아침] 마음이 어린 후(後) 서경덕(1489~1546)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가 하노라   - 병와가곡집   아름답고도 애절한 사랑 노래   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애틋하다. 시인은 자신의 그런 마음을 어리석다고 자책한다. 노심초사하는 일이 다 어리석다고 마음을 다잡아 보기도 한다. 겹겹이 구름 낀 산중에 님이 올 리가 없다. 그런데도 잎이 지고 바람 소리 들리면 행여 님이신가 하는 이 마음을 어찌하겠는가?   이 간절한 연시를 남긴 이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이다. 이 시조는 당대의 명기 황진이를 생각하며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진이는 성거산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던 화담을 비 오는 날 찾아가 유혹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화담의 인품에 반해 사제 관계가 되었으니 정신적 연인이었다. 황진이는 존경하는 스승과 박연폭포 그리고 자신을 일컬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했다. 이 시조에 화답한 것이라는 황진이의 시조가 있다. 화담의 시조 종장에 이어 부른 것이다.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찌 하리오    한 시대를 풍미한 아름답고도 애절한 사랑이 시가 되어 남았다.  유자효 / 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서경덕 마음 성리학자 화담 시조 종장 명기 황진이

2023-09-28

[시조가 있는 아침] 꿈에나 님을 볼려 -호석균(생몰연대 미상)

꿈에나 님을 볼려 잠 이룰까 누웠더니   새벽달 지새도록 자규성(子規聲)을 어이하리   두어라 단장(斷腸) 춘심(春心)은 너나 나나 다르리   -청구영언    이별의 아픔은 예술로 남고   임이 떠나신 후 그리운 마음을 참을 길 없다. 꿈에서라도 임을 보려고 잠을 청하였는데, 밤새도록 두견새가 울어 잠을 이룰 수 없다. 두견은 짝을 찾아 운다고 하니 애끊는 그 마음이야 너나 나나 다르겠는가.   호석균(扈錫均)의 호는 수죽재(壽竹齋)이며, 안민영과 함께 운애산방(雲崖山房)에 출입하던 가객이었다. 운애산방은 당대 풍류가객으로 이름 높던 박효관이 흥선대원군의 후원으로 필운대에 만든 장소였다. 이곳에서 19세기 후반의 수준 높은 가곡이 다듬어졌다. 따라서 호석균은 당대의 가객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의 한 생애는 이별의 연속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단장(斷腸)의 아픔이지만 그 슬픔은 예술 작품으로 승화하기도 한다. 이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고 범죄의 형태로까지 나타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다. 공자는 애이불상(哀而不傷)이라 하였으니 아무리 슬퍼도 몸과 마음을 상하지는 않아야 할 일이다. 유자효 / 한국시인협회장시조가 있는 아침 미상 당대 풍류가객 예술 작품

2023-09-08

[시조가 있는 아침] 사랑이 어떻더니 -이명한(1595∼1645)

사랑이 어떻더니 둥글더냐 모나더냐   길더냐 짜르더냐 발이더냐 자이더냐   하 그리 긴 줄은 모르되 끝 간 데를 몰라라   - 병와가곡집   변하지 않는 가치   조선의 사대부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이 사랑의 모양에 대해 묻고 있다. 둥글더냐? 모가 나더냐? 길더냐? 짧더냐? 몇 발이더냐? 몇 자더냐? 그에 대한 대답. 그렇게 긴 줄은 모르겠는데 끝 간 데를 모르겠다고 한다.   이토록 재치 있는 사랑의 시를 남긴 이명한의 벼슬길은 화려했다. 그러나 광해군 때 서모 인목대비를 폐하는데 불참해 파직되었고, 병자호란 때는 항전을 주장해 청나라 심양까지 끌려가 사경을 헤매기도 한 강골이었다.   경기도 가평군 상면 태봉리에 ‘연안 이씨 삼세비’가 있다. 아버지 이정구, 아들 이명한, 손자 이일상은 모두 대제학을 지낸 인물들이다. 연안 이씨 가문의 대단한 명예가 아닐 수 없다.   백주의 사람됨을 말해주는 일화 하나. 난리에 적의 추격이 다급해지자 어머니를 업고 강화도로 가는 나루로 갔다. 잘 알고 지내던 선비가 자신의 식솔들을 데리고 강어귀에서 막 배를 타고 떠나려는 것을 목격하고 자신은 죽어도 좋으니 노모를 모시고 가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그는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훗날 친척들이 그가 누구냐고 물었으나 그 사람 이름을 잊어버렸다고 했다. 시대는 변해도 사람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유자효 / 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사랑 이명 사대부 백주 아버지 이정구 경기도 가평군

2023-09-07

[시조가 있는 아침] 권농가 -남구만(1629∼1711)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칠 아이는 여태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 청구영언   농지는 농민이 가져야 한다   해가 점차 일찍 뜨고 종달새가 운다. 농사일이 시작되는 계절, 소 여물을 먹여야 할 머슴은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느냐. 고개 너머 긴 이랑 밭을 언제 갈려고 그러느냐.   조선 숙종 때 소론의 영수였던 약천 남구만이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 반대하다가 강원도 망상으로 유배되었다. 동해시 망상동 신곡 약천 마을에는 ‘재 넘어와 사래 긴 밭’의 지명이 있고 남구만이 이곳에서 이 시조를 지었다는 비석이 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 나라의 기반이었던 조선. 세종은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고 했다. 약천은 유배 중에도 근면 성실의 미덕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조는 농사는 머슴이 짓는 것으로 돼 있다. 양반인 내가 일찍 일어나 소를 끌고 밭을 가는 게 아니라 아이더러 농사일을 서두르라고 채근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계급이 분명한 조선조 사대부의 인식이었다.   오늘날 농지는 농민이 소유하고 농사를 짓도록 돼 있다. 그런데 소유만 하고 농사는 짓지 않는 사람들, 신도시가 들어선다는 개발 정보를 빼돌려 농지를 사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농민들의 피눈물을 자아낸다.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니다. 유자효 / 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권농가 조선조 사대부 약천 남구 오늘날 농지

2023-08-31

[시조가 있는 아침] 삼동(三冬)에 베옷 입고 -조식 (1501∼1572)

삼동(三冬)에 베옷 입고   조식 (1501∼1572)   삼동에 베옷 입고 암혈(巖穴)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볕 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지다 하니 눈물겨워 하노라   - 병와가곡집     ━   단성소(丹城疏)의 의기(義氣)     나의 생애는 추운 겨울에도 베옷을 입고 바위 굴에서 눈비를 맞았다. 구름 낀 볕 한쪽도 쬔 적이 없는데 서산에 해진다 하니 눈물이 난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중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읊은 시조다. 경상도 합천 출신의 남명은 두 차례의 사화를 경험하면서 훈척 정치의 폐해를 목격하고  산림처사로 자처하며 오로지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매진했다.     평생 벼슬을 거절하고 자유로운 몸으로 현실에 날 선 비판을 많이 가했다. 대표적인 글이 명종이 단성현감에 제수하자 사직하면서 올린 상소다. “전하께서 나랏일을 잘못 다스린 지 오래되어 나라의 기틀은 무너졌고 하늘의 뜻도 떠났으며 백성의 마음 또한 임금에게서 멀어졌다”며 명종을 “선왕의 외로운 후사(後嗣)”, 문정왕후를 “깊숙한 궁궐의 한 과부”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지금부터라도 학문에 힘써 덕을 밝히시고 백성이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일어서게 하시라”고 촉구했다. 상소를 받은 명종은 분개했으나 “선비의 언로가 막힌다”하여 벌주지 못했다.   일본을 경계한 남명의 걱정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인홍, 곽재우, 김면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 신속하게 일어나 의병으로 왜군과 싸웠다. 유자효 / 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삼동 베옷 베옷 입고 입고 바위 학문 연구

2023-08-24

[시조가 있는 아침] 삼동(三冬)에 베옷 입고

  ━   삼동(三冬)에 베옷 입고     조식 (1501∼1572)   삼동에 베옷 입고 암혈(巖穴)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볕 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지다 하니 눈물겨워 하노라   - 병와가곡집     ━   단성소(丹城疏)의 의기(義氣)     나의 생애는 추운 겨울에도 베옷을 입고 바위 굴에서 눈비를 맞았다. 구름 낀 볕 한쪽도 쬔 적이 없는데 서산에 해진다 하니 눈물이 난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중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읊은 시조다. 경상도 합천 출신의 남명은 두 차례의 사화를 경험하면서 훈척 정치의 폐해를 목격하고  산림처사로 자처하며 오로지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매진했다. 평생 벼슬을 거절하고 자유로운 몸으로 현실에 날 선 비판을 많이 가했다.     대표적인 글이 명종이 단성현감에 제수하자 사직하면서 올린 상소다. “전하께서 나랏일을 잘못 다스린 지 오래되어 나라의 기틀은 무너졌고 하늘의 뜻도 떠났으며 백성의 마음 또한 임금에게서 멀어졌다”며 명종을 “선왕의 외로운 후사(後嗣)”, 문정왕후를 “깊숙한 궁궐의 한 과부”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지금부터라도 학문에 힘써 덕을 밝히시고 백성이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일어서게 하시라”고 촉구했다. 상소를 받은 명종은 분개했으나 “선비의 언로가 막힌다”하여 벌주지 못했다.   일본을 경계한 남명의 걱정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인홍, 곽재우, 김면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 신속하게 일어나 의병으로 왜군과 싸웠다. 유자효 / 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삼동 베옷 학문 연구 제자 양성 정인홍 곽재우

2023-08-03

[시조가 있는 아침]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이황(1501∼1570)   제11곡   청산(靑山)은 어찌하여 만고(萬古)에 푸르르며   유수(流水)는 어찌하여 주야(晝夜)에 긋지 아니는고   우리도 그치지 말아 만고상청(萬古常靑) 하리라   - 도산육곡판본(陶山六曲板本)     ━   정치의 기반은 철학     조선 유학의 대종(大宗)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 안동에 돌아가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짓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던 63세 때 지은 연시조 12수 가운데 열한 번째 작품이다.   푸른 산은 어찌하여 영원히 푸르며, 흐르는 물은 또 어찌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가? 우리도 저 물같이 그치는 일 없이 저 산처럼 언제나 푸르게 살겠다는 학문 도야와 수양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만고상청’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이자 이상으로, 진리가 내면화된 경지라고 하겠다. 도산12곡은 전6곡과 후6곡으로 구성됐는데 전6곡은 사물에 접하는 감흥을 노래한 언지(言志), 후6곡은 학문 수양에 임하는 심경을 노래한 언학(言學)이라고 명명하였다.   퇴계는 우주의 현상을 이(理)와 기(氣)의 이원(二元)으로 설명하였다. 인간의 순수이성은 절대선(絶對善)이며 여기에 따르는 것을 최고의 덕으로 보았다.   조선의 사대부에게는 도학 정치라는 지향점이 있었다. 정치의 기반은 철학이다. 철학이 없는 정치는 사회를 혼탁하게 하고 역사의 지향점을 오도하기도 한다. 오늘날 한국 정치는 어떤 철학에 바탕하고 있는가? 유자효 / 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도산 학문 수양 조선 유학 오늘날 한국

2023-07-27

[시조가 있는 아침] 옥이 흙에 묻혀

  ━   옥이 흙에 묻혀     윤두서(1668∼1715)   옥이 흙에 묻혀 길가에 밟히이니   오는 이 가는 이 흙이라 하는구나   두어라 알 이 있을지니 흙인 듯이 있거라   -병와가곡집     ━   옥석을 가려야 한다     옥이 흙에 묻혀 길가에 버려져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흙인 줄 알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행인들 발길에 흙과 함께 밟히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아는 이가 있을 것이다. 언젠가 그가 나타날 때까지 흙인 듯이 있거라.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다. 1693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당쟁의 심화로 벼슬을 포기하고 시·서·화로 생애를 보냈다. 산수·인물·초충·풍속 등 다양한 소재를 그렸다. 특히 인물화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그의 자화상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자화상과 비견되기도 한다. 자기 내면을 투시하는 듯한 형형한 눈매, 불꽃처럼 꿈틀거리는 수염, 안면의 핍진한 묘사가 압권인 절세의 초상화다.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의 삼재로 불린다.   선거를 앞두고 정가의 움직임이 부산하다. 좋은 인재를 찾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중요했으나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옥(玉) 같은 인재가 흙에 묻혀 짓밟히고 끝내는 사라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다행히 현대의 선출직은 인사권자가 국민인 셈이다. 눈을 부릅뜨고 옥석을 가려야 한다. 그것을 포기하거나 제대로 가리는 데 실패하면 돌이 옥 행세를 하고 끝내는 그 돌에 맞아 죽기도 한다. 국민이 대접받는 것은 선거 때가 유일하며, 운명의 선택도 결국은 국민이 하는 셈이다. 유자효·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레오나르도 다빈치 압권인 절세 고산 윤선도

2023-07-20

[시조가 있는 아침] 비는 마음

  ━   비는 마음       서정주(1915∼2000)   버려진 곳 흙담 쌓고 아궁이도 손보고   동으로 창을 내서 아침 햇빛 오게 하고   우리도 그 빛 사이를 새눈 뜨고 섰나니   해여 해여 머슴 갔다 겨우 풀려 오는 해여   5만원쯤 새경 받아 손에 들고 오는 해여   우리들 차마 못 본 곳 그대 살펴 일르소   -현대시조 창간호(1970.7)     ━   설날 평화가 깃들기를     이 시조는 ‘현대시조’가 창간 축시를 미당 서정주 시인께 받아 실은 것이다. 시조 전문지를 새로 내니 그동안 버려진 곳은 흙담을 쌓고 아궁이도 손을 보고 동으로 창을 내서 아침 햇빛도 오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도 그 빛 사이에 새눈을 뜨고 서겠다는 것이다.     이 시조의 절창은 둘째 수다. 우리가 만나는 해는 머슴 갔다 겨우 풀려 오는 해다. 우리 시인데도 남의 집에서 머슴을 살다가 5만원쯤 새경을 받아 손에 들고 오고 있다. 이제 살아갈 새집을 지었으니 우리가 차마 못 본 곳들을 살펴 일러달라는 것이다.   미당의 이런 기원은 설을 맞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해온다. 이제 우리는 새해 새 빛을 새로운 마음으로 맞아야겠다. 흙담 쌓고, 아궁이 손보고, 동으로 창도 내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하겠다. 설을 맞는 국내외 동포들의 마음과 가정에 평화가 깃들기를…. 그리고 우리의 소중한 터전에 정의의 새 빛이 찾아오기를…. 유자효 / 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마음 마음 서정주 현대시조 창간호 미당 서정주

2023-07-13

[시조가 있는 아침] 녹양(綠楊)이 천만사(千萬絲)인들

  ━   녹양(綠楊)이 천만사(千萬絲)인들     이원익(1547∼1634)   녹양이 천만사인들 가는 춘풍(春風) 잡아매며   탐화봉접(探花蜂蝶)인들 지는 꽃을 어이하리   아무리 사랑이 중한들 가는 님을 잡으랴   -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   위대한 반대     푸른 버들이 천만 올 실이라 해도 가는 봄바람을 매어둘 수 있겠는가? 꽃을 탐하는 벌과 나비라 해도 지는 꽃을 어찌하겠는가? 아무리 사랑이 깊다고 해도 가는 님을 잡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 흐르는 시간은 간절한 손길들이 아무리 많아도 막지 못하며, 벌과 나비가 아무리 원해도 지는 꽃은 어쩔 수 없다. 사람의 사랑도 그와 같아서 돌아선 님의 마음은 잡을 길 없다.   1597년 2월, 이순신이 한산 통제영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장군을 죽이려 하는 선조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때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선 이가 영의정 겸 도체찰사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이다.     전쟁을 총지휘하는 도체찰사가 “전하께서 신(臣)을 폐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신 또한 전쟁 중에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을 폐하지 못하옵니다”라고 간한 것이다. 이틀의 국문 끝에 장군은 목숨을 건지고 백의종군케 되었으니 청백리 오리 대감의 위대한 반대가 장군을 살리고 나라를 살린 것이다.   이 같은 일은 현대라 해도 다르지 않다. 때로 위대한 반대가 개인과 나라를 살리고, 비겁한 동조가 개인과 나라를 죽이기도 하는 것이다. 유자효 / 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천만사 청백리 오리 동조가 개인 그때 정면

2023-07-06

[시조가 있는 아침] 권주가(勸酒歌)

  ━   권주가(勸酒歌)     소춘풍(1467∼?)   당우(唐虞)를 어제 본 듯 한당송(漢唐宋) 오늘 본 듯   통고금(通古今) 달사리(達事理)하는 명철사(明哲士)를 어떻다고   제 설데 역력히 모르는 무부(武夫)를 어이 좇으리   - 해동가요     ━   작은 나라가 사는 법     조선 성종이 문무백관에게 연회를 베풀면서 기생 소춘풍에게 술잔을 돌리게 했다.     무관 출신의 병조판서가 자기보다 서열이 높은 예조판서 앞에 앉은 것을 보고 예판에게 먼저 잔을 권하며 한 노래(唱)다. 태평성세에 고금의 사리에 통달한 문신을 두고 어찌 제 자리도 모르는 무인을 따르겠느냐고 한다. 병판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자 그에게 잔을 권하며 한 노래.   “전언(前言)은 희지이(戱之耳)라 내 말씀 허물마오/문무일체(文武一體)인줄 나도 잠간 아옵거니/두어라 규규무부(赳赳武夫)를 아니 좇고 어이리”   먼저 한 말은 듣고 웃으시라고 한 것이고 문무가 하나인 줄 나도 아는데 헌헌장부 무인을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다. 예판이 언짢아하자 이번에는, “제(齊)도 대국(大國)이요 초(楚) 역시 대국이라/조그만 등국(謄國)이 간어제초 하였으니/두어라 하사비군(何事非君)가 사제사초(事齊事楚)하리라”   제나라도 대국이고 초 역시 대국인데 조그만 등나라가 그사이에 끼어 있으니 누군들 주인이 아니겠는가? 다 모시겠다고 한다. 유자효·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권주가 기생 소춘풍 조선 성종 무관 출신

2023-06-29

[시조가 있는 아침] 개세가(慨世歌)

  ━   개세가(慨世歌)     이색(1328∼1396)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 있어 갈 곳 몰라 하노라   예전에 대중목욕탕 건물이었다고 한다.   - 청구영언     ━   오늘도 우리는 갈 곳을 모른다     흰 눈이 내리기를 그친 골짜기에 구름이 험하다. 봄의 전령사 매화는 어느 곳에 피어 있는가?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을 몰라 한다.   백설과 구름, 매화를 찾아 붉게 물든 노을 앞에 서 있는 선비. 한 폭의 그림 같은 대춘(待春)의 시다. 그러나 이색이 활동하던 시기를 생각하면 이 시조는 중의적으로 읽힌다. ‘구름’은 역성(易姓)혁명을 하려는 신흥 세력을, ‘매화’는 고려를 지키려는 우국지사로 치환하면 역사적 전환기에 직면한 지식인의 고민으로 읽을 수 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고려말 3은의 하나로 불린다. 익제 이제현에게 정주학을 배워 불교 사회이던 고려에 성리학을 새로운 사회의 개혁 지향점으로 제시하였다. 정몽주·정도전·권근·이숭인·하륜 등이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그는 역성혁명에 협력하지 않았으나 제자들은 혁명참여파와 절의파로 나뉘어졌다. 정몽주 피살 후 유배되었다. 조선 개국 후 태조는 그를 한산백(韓山伯)으로 봉하고 예를 다하여 출사(出仕)를 권유했으나 “망국의 사대부는 오로지 해골을 고산(故山)에 파묻을 뿐”이라며 고사하였다.     여주로 가던 배 안에서 급사해 사인(死因)에 의혹을 남겼다. 조선 세조 때, 사육신의 한 명인 이개가 그의 증손이며 토정 이지함이 6대손, 선조 때의 재상 이산해는 7대손이다. 유자효·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개세 정몽주 피살 전령사 매화 6대손 선조

2023-06-22

[시조가 있는 아침] 호기가(豪氣歌)

  ━   호기가(豪氣歌)     김종서(1383∼1453)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데   만리 변성(邊城)에 일장검(一長劍)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   보기 드문 남성적 정서의 시     한국 시의 주된 정서는 여성적이다. 문자로 전해지는 최초의 한국 시라고 할 수 있는 고조선의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고구려의 황조가(黃鳥歌), 백제의 정읍사(井邑詞), 신라 향가의 상당수가 여성적 정서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이는 고려 시대에도 다르지 않았고, 고시조도 여성적 서정이 주조를 이룬다. 이는 한국인 전통의 한(恨)의 정서와도 결을 같이 한다.   그런데 드물게 강한 남성 취향의 노래가 있으니 바로 김종서의 이 시조다. 이 작품은 그가 세종의 명을 받아 1433년 함길도 도절제사에 임명되어 8년 동안 북방에서 6진을 개척했던 당시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몰아치는 북풍은 나뭇가지를 흔들고 밝은 달빛에 비친 눈은 차디차기만 한데, 멀리 떨어진 변방의 성루에서 긴 칼을 짚고 서서 휘파람 길게 불고 큰 소리로 호통을 치니 세상에 거칠 것이 없다. 호방한 장군의 기개가 넘치는 시다. 이때 그가 개척한 두만강이 국경이 되었으니 후손들이 큰 신세를 지고 있는 선조라고 하겠다.   손자를 부탁한 세종의 고명대신(顧命大臣)이었던 그는 단종을 지키다 왕위를 노리는 수양대군에게 피살되었다. 유자효 / 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호기 여성적 정서 한국인 전통 남성적 정서

2023-06-15

[시조가 있는 아침] 팽이

  ━   팽이     이우걸 (1946∼ )   쳐라, 가혹한 매여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나는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리라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 한국대표명시선100 ‘어쩌면 이것들은’     ━   의인 열사가 그리운 시대     가혹한 자기 단련의 시다. 팽이를 치고 쳐서 최고의 속도에 이르면 무지개가 보인다, 아무리 나를 쳐도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겠다는 결기가 드러난다. 이 시조의 대단원은 역시 종장이다. 그 무수한 고통을 건너면 접시꽃 하나 피어난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시조 이미지 전개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의인을 만나기 드문 시대, 지사가 사라진 시대. 우리는 의인 열사가 그립다. 이런 지사는 어떤 가혹한 매가 내려치더라도 끝내 이를 견뎌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할 때 태어나는 것이다. 상처 입은 조개가 진주를 품듯, 시련 없는 성취는 없다. 한국은 의인 열사의 전통이 맥맥히 이어져온 나라다. 그런 의인들이 민족의 명을 이어 오늘의 우리가 있게 했다. 이 시대인들 왜 그런 이가 없겠는가? 어쩌면 이 순간 그런 지사가 태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승훈 시인은 “이우걸은 자연에서 현실을 읽고, 현실에서 고통을 읽고, 마침내 고통에서 그의 이상, 이상으로서의 자연을 읽는다”고 평했다. 1983년 중앙시조대상 신인상을, 1995년 중앙시조대상을 수상했다. 1983년과 2012년 윤금초·박시교·유재영과 함께 사화집 『네 사람의 노래』를 문학과 지성사에서 펴냈다. 유자효·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팽이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의인 열사 시조 이미지

2023-06-08

[시조가 있는 아침] 동짓달 기나긴 밤

  ━   동짓달 기나긴 밤     황진이 (1506∼?)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비구비 펴리라   - 청구영언     ━   시조가 보여주는 절정의 아름다움     일년 중 가장 긴 동짓달의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서 봄바람을 품고 있는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그리운 님이 오신 날 밤에 구비구비 펴겠다니 그 긴 밤이 얼마나 달콤하고 행복할까? 절정의 비유이며, ‘서리서리’ ‘구비구비’ 같은 우리 말의 표현도 절정의 수준이다. 우리는 이 시조 한 편으로 시의 천재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그녀의 작품들은 주로 연석(宴席)이나 풍류장(風流場)에서 지어졌으나 문학적으로 높은 완성도를 갖추고 있는 명편들이다.   황진이의 아버지는 진사였으나 어머니가 천민이라 조선의 신분제인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천출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지만 양반집 딸 못지않게 학문을 익히고 예의범절을 배웠다. 명월(明月)이란 이름으로 기생이 되었는데 시와 거문고, 춤, 서예, 그림에 모두 능했다. 성리학 지식도 해박해 화담 서경덕을 존경했으며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자칭했다. 벽계수(碧溪水)라 불리던 왕족 이종숙을 사랑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그에 대한 유명한 연시(戀詩).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一到) 창해(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오니   명월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유자효 / 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동짓달 청산리 벽계수 홀어머니 슬하 화담 서경덕

202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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